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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자락에 번뇌 담아 허공 속으로 휙~(한겨레 신문)

  • 관리자
  • 2015-05-16 19:25:08
  • 조회 : 2,070

장삼자락에 번뇌 담아 허공 속으로 휙~

등록 : 2014.10.07 19:46수정 : 2014.10.07 20:55

 




 
우봉 이매방이 춤사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승무는 인간의 고뇌와 해탈을 진솔하게 표현한다. 승무는 기다란 장삼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몸 굴림의 반동과 돌림, 다양한 발디딤 기술이 완성돼야 뿌리침과 솟구침의 춤새가 살아난다.

[건강과 삶] 전통 춤 외길인생 이매방

여자 옷 입고 춤추기 좋아했던 소년
아버지 반대 딛고 최고 춤꾼 경지에
인간 희로애락 춤사위에 담기 80년
“마음이 고와야 춤사위도 고운 법”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그는 분명히 ‘여성보다 더 여성스런 삶’을 살아온 이 시대의 ‘외로운 남자’였다. 평생 한국 무용 외길을 살아온 우봉 이매방(88)의 춤 철학은 놀랍게도 ‘고운 마음’에서 시작된다. 몸짓은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형상일까?


그의 투명한 손 피부 아래의 붉은 정맥과 푸른 동맥이 선명하게 보인다. 주름이 깊긴 하나 따뜻하다. 그의 손끝에서 놀라운 춤사위가 시작되곤 했다. 그가 추는 승무는 보는 이들의 숨을 멈추게 했다.



 


 

느린 염불 장단에 맞춰 엎드렸던 그가 서서히 일어서며 손끝에 늘어진 장삼을 허공에 뿌린다. 그의 기(氣)가 실린 장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힘차게 허공을 비상하곤 다시 살포시 내려앉았다. 장삼의 선이 곱다. 그 장삼은 인생의 수많은 고민을 품은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가 느리디느린 진양조 가락에 맞추어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버선코를 쳐들었다. 거기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가 존재했고, 흔들리지 않는 고집스런 인생의 몸부림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빠른 휘모리장단에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장삼의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마지막 장삼 한 가닥이 허공을 향해 흩뿌려진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장삼 자락이 바닥에 내려오는 그 ‘긴 시간’에 보는 이들의 온갖 번뇌는 질식했다.


승무를 추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의 화장한 얼굴에 얼룩이 지곤 했다. 고깔을 쓰고 춤을 추며 그는 울었다. 무대 위에서 그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진심’으로 표현했다. 그러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승무가 “한 여인을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 중이 됐는데, 수도를 하다가 문득 속세가 그리워 가슴속 온갖 번뇌를 잠재우기 위해 추는 춤”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무대 위에서 엎드린 채 모든 동작을 멈추고, 오직 앞으로 내민 팔 끝을 순간적인 튕기는 움직임만으로 장삼이 생명력을 얻은 듯 팔랑거리게 하는 ‘꼬리치기’ 동작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지난 1일 서울 양재동 그의 자택에서 만난 우봉은 입고 있는 푸르디푸른 한복의 소매를 들어 올렸다. “이것 봐. 한복 소매는 이렇게 둥글게 만들어야 해. 마치 붕어의 모습이지. 그런데 지금 한복은 일자로 만들어. 그러니 우리의 멋이 풍기지 않아.”


평생 한국 무용 외길을 살아온 우봉 이매방(88).


그는 평생 직접 자신의 무용복과 생활한복을 만들었다. 그가 쓰던 재봉틀도 10대에 이른다. 110년 된 독일제 재봉틀이 그의 애장품이다. 젊은 시절, 그는 춤을 연습하고, 공연하고, 틈이 나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곱디고운 한복도 직접 지어 입혔다.


“어릴 때부터 옷 만드는 일이 좋았어. 그러니 기집애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


세살 때부터 여자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춤추길 좋아했던 소년은 유전자에 깊숙이 심어져 있는 예인으로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속인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집안의 내력이 싫었다. 그래서 무속인의 길을 멀리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전통춤의 전승 주체는 광대나 기생, 무녀 등의 민간예인이었다. 일곱살 때부터 집 가까이 있던 전남 목포 권번에서 기생들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10대엔 호남의 이름난 춤꾼들에게 춤을 배웠다. 또 중국에 가서 몇년 사는 동안 중국의 대표적인 경극 배우인 매란방(메이란팡)으로부터 중국 전통춤도 익혔다. 애초 ‘이규태’라는 본명은 우봉이 매란방과 같은 예술가가 되려는 마음에 ‘매방’으로 개명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춤을 추는 것을 싫어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가문의 망신이라고 경장히(굉장히) 난리였제. 내가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에서 광주까지 작대기(지팡이) 짚고 무대 위로 올라오셔서 춤추는 나를 후리 패시고, 난 도망가고….”


명창 임방울(1904~1961)이 목포역에서 드럼통 40여개를 깔고 그 위에 송판을 덮어 만든 무대에서 진행하던 명인 명창대회에서 그는 우연히 무대에 섰다. 원래 승무를 추기로 한 출연자가 못 나오게 되자 그가 대신 나서서 승무를 췄다. 모두들 놀랐다. 노인네들은 “오매, 기집앤 줄 알았더니 사내자식이네. 이쁘고 춤도 잘 추네”라며 박수를 쳤다.


창은 재질이 없어 일찍 포기했으나 북, 장구 등 악기는 열심히 공부했다. 훗날 그의 대표 무용이 된 승무(중요무형문화재 27호)와 살풀이(중요무형문화재 97호) 외에도 그는 장검무, 화랑무, 박쥐춤, 무당춤, 학춤 등 다양한 춤을 전수했다. 그가 평생 어떤 조직의 직함이나 단체장을 맡지 않은 것도 그의 인생 철학 때문이다.


“인생은 외길로 가야 혀. 머리 굴리고 샛길로 빠지면 어떤 것도 이루지 못혀. 어렵다고 가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놈들을 보면 기겁을 해.”


젊은 시절 무대 위에서 펄펄 날던 우봉은 자신의 집안 곳곳에 붙어 있는 옛날 사진을 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저 사진에 있는 미국인, 정말 유명한 세계적인 무용가여. 이제 죽었지. 그 옆에 있는 사진의 세 사람도 이제는 다 저세상 사람이 됐어.”


그가 처음 춤을 배울 때 유일한 남성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그 시대에 활동했던 무용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한 생존자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하며 체중이 15㎏ 정도 빠졌다. 후유증은 없으나 평생 춤을 췄기 때문인지 허리가 편치 못하다. 마흔두살의 나이에 결혼해 얻은 딸(현주)은 자신의 뒤를 이어 춤을 춘다. 최고의 제자는 역시 부인(김명자)이다. 열일곱살 연하의 부인은 승무와 살풀이의 전수 교육조교이니 후계자인 셈이다.


“승무는 우리 춤 가운데 가장 어렵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춤이야, 함부로 추는 춤이 아니지. 살풀이는 요염하고 이쁜 춤이야.”


우봉은 자택 이층에 있는 무용 연습실에서 오랜만에 손끝에 장삼을 잡았다. 딸이 쳐 주는 장구 장단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비록 그때의 춤사위는 아니지만 지난 80년간 그를 사로잡은 춤의 떨림은 아름답고 무겁게 배어 나왔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동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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